서울시병원회(회장 고도일)가 정기이사회(제1차)와 함께 병원CEO포럼을 가졌다. 이 포럼에선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김 헌 교수가 '신화의 숲에서 지혜의 길을 찾다-에코와 나르키소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한 김 헌 교수는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양고전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고, 현재 세계수사학회 회장과 양화진문화원 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이 강연을 요약해 간추린 내용이다.
제가 이 시간 준비한 내용은 그리스 로마 신화로서, 신화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 다음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신화 속의 인물인 '에코'와 '나르키소스'에 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은 그 안에 어떤 뜻이 숨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신화는 놀라운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 말로 '필로미토스'라고도 하는데, '필로'는 사랑한다는 뜻이고, '미토스'는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그런가 하면 '필로소포스'라고도 하는데 '소포스'라는 말이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다시 말하면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철학가의 첫걸음이 바로 신화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실제로 인류 지성사에서도 모든 지성 활동에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신화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세계의 민족들이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네들의 근원과 기원 그리고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으로 구성한, 지적인 성과가 신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철학과도 통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제우스를 비롯해 올림포스의 12신과 이외에도 많은 신과 인간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저는 오늘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어느 정도 비춰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로 '에코'라는 요정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에코'라고 하면 신화의 인물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일상생활에서도 적지 않게 듣게 되는 단어일 것입니다. '에코'는 우리말로 '메아리'지요. 또 음향학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낱말이기도 하고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에코'를 주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속에서 이야기꾼으로 유명했던 요정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이 '에코'가 살던 곳은 그리스 중부에 자리한 헬리콘산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화가의 그림에도 나오는 이 헬리콘산은 음악의 여신들이 종종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고, 이외에도 수많은 아름다운 여자 요정들과 멋진 남자 요정들이 와서 쉬어가곤 하는 곳이기도 했답니다.
바로 이 산에 '에코'가 살고 있었는데 굉장히 말을 잘하는 이야기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녀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지요.
그런데 이런 '에코'를 특별히 좋아하는 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짐작하시겠지만, 제우스 신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우스가 '에코'를 왜 좋아했을까요? 아름다운 여자 요정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제우스는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우스가 에코가 있는 헬리콘산에 내려온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많은 요정과 여신들이 이 산에 와서 쉬어가기 때문이었지요.
제우스가 이 헬리콘산에서 여러 여신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에코를 좋아했는데 그 까닭은 그녀의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코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틈엔가 재미가 있어서 또 해보라고 했고, 이에 에코도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대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제우스의 아내가 헤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의 질투심이 남달랐던 것도 잘 아시지요? 사실 남편이 자주 바람을 피우는데 그 정도로 질투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다만. 어느 날 제우스가 자리를 비우자 그의 아내 헤라는 '이 양반이 또 바람피우러 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나서 그가 자주 가던 헬리콘산으로 내려왔답니다. 헤라가 이 산에 내려와 제우스를 찾다가 에코를 만난 것이지요. 사실은 에코가 헤라의 앞을 막아섰다는 말이 맞겠지만요. ‘헤라 님 어디 가세요?’라는 에코의 말에 헤라는 ‘나 바쁘니까 건드리지 마’라며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에코가 ‘그거 아세요’라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헤라는 ‘무슨 일인데?'라며 관심을 보이자 에코가 그녀의 장기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이 이야기에 심취해 헤라는 자신이 이 헬리콘산에 왜 내려왔는지조차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제우스는 도망갔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우스는 에코의 도움을 받아 몇 차례에 걸쳐 아내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제우스가 에코를 좋아했던 이유이기도 한 것이지요.
이런 일이 몇 차례 거듭되자 헤라 역시 자신이 에코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가 또다시 자리를 비웠고, 이에 분노한 헤라가 헬리콘산에 내려왔는데 이때 에코가 또다시 헤라의 앞을 막아선 것입니다. 에코는 헤라가 이미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헤라에게 ’헤라 님, 그거 아세요?’라며 또다시 낚싯밥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헤라는 “네가 달콤한 이야기로 나를 골탕 먹여 왔다는 것을 내가 다 안다. 그렇게 나를 속인 죄로, 더이상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내가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벌이란 것이 에코의 목소리를 막아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코에 있어선 치명적인 처벌이었던 것이었지요. 다만 남이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끝부분만을 반복하게 할 수 있게 해 주었지요. 그래서 에코가 ‘헤라 님 그건 너무해요’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벌을 내리겠다’라는 마지막 부분만을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지요.
친구들이 와서 “에코야”하고 부르면 “그래”하고 대답해야 하는데 “에코야”라고 친구의 말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고요. 에코는 헤라의 진노로 벌을 받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친구들은 에코가 자신들을 놀리려고 그러는 줄 오해를 하여 한 사람, 두 사람 에코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완전히 에코 혼자가 되고 말았지요.
이 장면을 상상하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한번 듣고 웃으며 지나갈 수 있는 허황된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상징과 은유로 읽으면 여러분들도 심상치 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어떤 모습을 비춰주는 것, 그러니까 이런 현상이 우리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누군가가 말을 많이 할 때 이를 듣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막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에코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상대방의 발언권을 뺏는다는 것은 결국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목소리를 빼앗기는 것과 진배없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목소리, 발언권을 빼앗는 것은 처벌적 응징적인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에코'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해” 이렇게 규제를 받게 되고, 그것이 내면화되면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빼앗기면서 강요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교육이라는 것이 그런 요소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교육이라는 것이 에코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그동안 활동해 오던 곳으로부터 소외되면서 더불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며 외로워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 전반이 에코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목소리를 잃고 외로워진 '에코'가 칩거하면서 몰래몰래 혼자 다니다가 어느 날 한 청년을 보게 됩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나르키소스'였습니다. 이때 '나르키소스'는 숲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에코가 그를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나르키소스를 본 순간 에코의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남자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코는 자기도 모르게 나르키소스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코는 나르키소스의 앞에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한편 친구들과 함께 사냥하던 나르키소스는 사냥에 너무 몰두하느라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서 헤매다가, 수풀 속에 숨어 몰래 따라오던 에코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르키소스가 돌아서서 “거기 누가 있니?”라고 물어봅니다. 나르키소스가 이렇게 물으면 에코는 당연히 “예, 저는 에코라고 해요”라고 대답을 하며 나서야 하는데 나르키소스의 말을 따라 '거기 누가 있니”라고 대답하고 만 것입니다. 나르키소스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지요. 누군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나르키소스는 ‘누군지 나와 봐’라고 했는데 이 말에 ‘나와봐’라고 나르키소스의 뒷 말을 되풀이하면서 에코가 수풀에서 뛰쳐나와 나르키소스를 뒤에서 껴안았답니다. 그 순간에 에코가 나르키소스를 왜 껴안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본능에 따른 것이었겠지요.
갑자기 껴안긴 나르키소스는 깜짝 놀라 ‘껴안지 마, 내게서 좀 떨어져’라고 했는데 이 말에 에코는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역시 나르키소스가 말한 대로 ‘껴안지 마, 떨어져’라고 대답을 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깊은 숲속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헤매다가 갑자기 나타난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뒤에서 껴안고, 자신이 하는 말에 복창하듯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껴안고 있던 에코를 있는 힘을 다해 떨쳐내고는 급히 그곳을 떠나가 버렸지요.
이렇듯 격렬하게 자신을 떨쳐내며 떠나가는 나르키소스를 보며 에코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서 처음 사랑의 마음이 싹튼 사람을 껴안았던 것인데 이를 모질게 뿌리치고 떠나가는 남자를 보면서 엄청난 수치감과 슬픔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코는 깊은 동굴로 들어가 이전보다 더 두문불출하며. 다만 헤라의 저주 때문에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반복해 가며 하루하루 말라가다가 어느 날 강풍이 이 동굴을 덮쳤을 때 에코의 몸은 먼저로 변해 날아가 버리고 목소리만 남아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복하는 메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에코로 인해 놀라 도망한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그 근처에 사는 요정 릴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릴리오페가 이 아기를 낳았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자신이 낳은 아이지만 너무 잘 생겼기 때문이었지요. ‘너무나 잘 생겨서 이 세상을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예언자를 찾아 나르키소스가 너무 잘 생겨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 물어보았답니다. 그런데 예언자 하는 말이 “애가 너무 잘 생겨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 일찍 죽을 수 있을 것”이라며 ‘오래오래 살게 하려면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모르게 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아기의 어머니 릴리오페는 아기 주위에 있는 모든 거울을 없앴고, 아이가 잘 생겼다는 그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르키소스는 그 잘생긴 모습으로 인해 주위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나르키소스는 날로 교만해져 갔습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에코로 인해 깜짝 놀라 도망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한참을 달리다 보니 목이 많이 마른 거예요. 그런데 몸에 지닌 물병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 맑은 샘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급히 뛰어가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나르키소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물속에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너무도 잘생긴 한 남자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태어나서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어서 샘물에 비친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르키소스는 샘물에 비친 그 얼굴을 향해 “너 누군데 이렇게 잘 생긴 거야. 나하고 친구가 되지 않을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샘물에 비친 그 얼굴 역시 자신과 같이 입을 오물거리며 무어라고 하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아 저 친구도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악수를 하려고 손을 쑥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샘물에 비친 그 잘생긴 남자도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반가운 마음에 그 손을 꽉 잡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샘물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고 샘물을 휘저어 놓았으니 물에 비친 얼굴이 사라질 수밖에요.
나르키소스의 반가워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하자는데 악수는 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샘물이 잔잔해지자 사라졌던 얼굴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또 기쁜 얼굴이 되어 ‘”어 너 가지 않았구나. 나는 네가 가버린 줄 알고 많이 걱정했어. 우리 입맞춤이나 할까?”라며 얼굴을 샘물 가까이 가져가자 샘물에 비친 얼굴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얼른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는 순간 다시 샘물에 비친 얼굴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몇 차례나 계속되다 보니 나르키소스도 샘물에 비친 그 얼굴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얼굴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얼굴이 혹시 내가 아닐까?”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계속해서 샘물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이지요. 떠나려고 몇 번이고 일어섰다가도 샘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그리워서 다시 돌아오고, 또 가려다가 돌아오는 행동을 계속했고, 목이 말라도 샘물에 비친 그 얼굴이 사라질까 싶어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샘 곁에 서서 하루하루 말라가다가 나르키소스는 에코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강한 바람이 불자 그 역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사라진 그 샘물가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 꽃을 수선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어떤 현상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겁니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집착하고,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에 빠져든다면 이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한 사랑, 즉 나르시시즘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가 과도하다든지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지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볼 수 있으므로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때 좋아한다는 그 감정이 어떤 것일까요? 남자는 여자의 무엇을 좋아한 것일까요?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내 마음에 드는 어떤 부분을, 어떤 요소를 그 대상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그런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트러블이 생깁니다. 결혼하고 나서 이혼도 하지요. 그리고는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상대방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좋아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그 모습을 점점 잃어 갈 때 사람들은 못 견디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한다는 건, 뭔가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내가 그 사람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말해 샘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르키소스의 상징성을 풀어보면 결국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어떤 부분, 나를 닮은 유사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나와의 차이를 인정해 주면서 그 차이조차도 품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 우정에 실패하는 이유도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사실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 속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르시시즘에 빠진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 역시 잘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춰서 나의 것이 아닌 다른 부분에 내가 나를 양보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야기한 두 개의 신화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에코’와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나르키소스’의 만남은 이들 둘 모두에게 불행이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 둘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어떤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점점 자신의 개성을 잃어갈 때 ‘에코’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의 강요에 굴복할 때 어쩌면 나를 잃어버리고, 존재한다고 해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메아리처럼 울려대는 ‘에코’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는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든다면 그것은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고,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에코’와 ‘나르키소스’ 그 어디쯤엔가 우리가 균형 있게 자리를 잡을 때 나를 지켜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에코’와 ‘나르키소스’ 신화의 숲에서 만난,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아닐는지요. [정리 김성환]